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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온 날 아침

당번을 하던

영미

 

걸레를 빠느라

붉어진 손이

이토록 조그마한 줄을

나는 미처 몰랐다.

- 임길택, 영미의 손 전문(할아버지와 요강)

 

지난주에 임길택 선생님의 시를 보내드렸습니다. 보내고 나서 생각해보니, 임길택 선생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계절에 맞지 않지만 그 시도 함께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영미의 손>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몹시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벌써 15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한 번도 영미의 손이 ‘이토록 조그마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도 보지 못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는지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그 조그마한 영미(들)에게 함부로 대할 때가 많았습니다. 걸핏하면 빨리 서두르라고 하거나 해낼 수 없는 일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걸레를 빠느라 붉어진 손’을 한 채 어려운 일들을 해내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손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 년을 보냅니다.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영미의 손>을 읽으면서 내가 한심한 선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요.

내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기싸움을 했습니다. 내 말을 하느라 아이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나 지식이 중요했지 아이들의 어려움은 알아주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아이들이 쓴 시를 읽습니다.

언젠가 학년말이 되어 선생님에 대해 써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밉다’고도 썼고, 무섭다고도 했습니다. “우리 보고는 조용히 하라고 하고 / 선생님 혼자 실컷 말한다.”라고 쓰기도 하고, “암만 봐도 잘 생긴 곳은 / 없는 것 같은데 / 선생님의 잘난 척이 싫었다.”고 쏘아붙입니다. 부끄럽고 아픈 말들입니다.

그래도 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이 좋다고 써줍니다 고맙다고도 했지요. ‘어디가 고마운데?’ 물어보면 지난번에 우유 까줘서 고맙다고 하고, 추운 겨울 놀고 들어왔을 때 온풍기 앞에 가라고 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조그마한 손을 가졌지만 아이들 마음은 넓고 넓습니다. 저는 넓은 아이들과 살면서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 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오늘 아침 서진이가 살며시 와서 경수가 놀렸다고 했습니다. 혀를 날름거리다가 바보라고 했답니다. 저도 살며시 경수를 불러서 그랬냐고 물었습니다. 경수는 내 눈을 피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좋게 타이르려는데 들으려고도 않습니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경수가 물기 어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침마다 내게 과자나 사탕을 놓아두는 아이였습니다.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우리 아빠면 좋겠다고 말해준 아이였지요. 아이들이 떠난 교실에 와서는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봐주기도 했습니다. 경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면서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안해져서 경수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경수가 주르르 눈물을 흘립니다. 아침부터 경수를 울리고 말았지요. 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정하게 말해주었더라면’ 하면서 후회합니다. 후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래 이름은 동수가 아니지요. 어쨌건 동수도 영미처럼 손이 작습니다. 동수는 글자를 읽을 줄 모릅니다. 받침 없는 홀소리를 띄엄띄엄 읽습니다.

학기 초에 동수 글자 공부를 시키겠다고 <우리말우리글>을 샀습니다. 매일 한 쪽씩 읽어나가다 보면 1학기가 지나면 글자를 다 읽을 수 있게 된다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동수 어머니에게 한 쪽씩 연습을 해달라고 했고요.

어머니께서는 바쁘셔서 아이와 글을 읽을 시간이 없나 보았습니다. 한동안 저는 아침시간에 한 줄씩 읽어주고 따라하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들어오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에 동수는 그날 배운 것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동수가 책을 읽을 때면 다른 아이들도 조용히 기다려주었습니다. 동수가 책을 읽으니 다들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시들해졌습니다. 제가 바빠졌나 봅니다. 동수에게 가르쳐주지도 않고 그냥 읽어보라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동수는 머뭇거리다가 그만 내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날이 많았습니다. 동수가 안 되었던지 아침에 장우가 가르쳐줄 때도 있고 지아가 가르쳐줄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유진이가 도맡아 가르칩니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 유진이가 한 줄을 읽고 동수가 따라서 읽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동수가 가쁜하게 한 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동수가 다 읽고 나서 유진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유진아, 1학년 때 선생님도 못 가르쳤고, 2학년 때 선생님도 못 가르쳤어. 선생님도 하다가 바빠져서 못할 때가 많았는데 유진이 니가 한다. 니가 동수한테 진짜 선생님 같다. 부탁할게.”

 

유진이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가정방문 갔을 때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해서 제가 수제자로 삼은 아이입니다. 선생님처럼 다른 아이도 잘 돌봐주고, 저처럼 소리를 지르지도 않습니다. 가만가만 타이릅니다. 아이들도 저보다 유진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반에서는 나보다 더 선생님 같은 아이가 많습니다. 나이가 많고 배운 것이 많다고 선생님을 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유진이와 동수한테서 내가 살아갈 것을 배웁니다.

오늘도 비가 옵니다. 오늘 오는 비는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이런 날에는 가만히 책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2016년 5월 10일

물골안에서 김강수 아룀

 

<덧붙이는 말>

1. 다음 주는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다른 기념일들은 잔치 같은 느낌인데 스승의 날은 왠지 어색합니다. 좋은 곳으로 놀러가기도 그렇고 맛난 음식을 먹기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선생이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이럴 때 나에게도 찾아뵐 수 있는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에게도 고마운 선생님이 있지만 한 번도 찾아뵙지 않아서 끊어졌습니다. 마음만 그리워할 뿐이지요.

이웃 중학교에서 아이들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짜장면 사달라고 할 텐데, 이번에는 우리반 승혜네 집에 가서 좀 팔아줘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승의 날 미리 축하드립니다. 저에게는 희망을 보여준 모임 선생님들이 스승입니다. 지금껏 걸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묵묵히 가시기 바랍니다. 그 뒤를 따라서 저도 가겠습니다.

 

2. 서울모임 박지희 선생님의 1학년 원고가 들어와서 편집하고 있습니다. 빠르면 이번 여름호에 함께 나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삶말출판사에서 처음으로 내는 책이 될 것입니다. 그 책이 선생님들께 전해지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 울렁거립니다.

누구든지 쓰고 모두에게 나누는 출판운동을 하자고 한지 1년만입니다. 그렇게 나온 책으로 나누고 또 새롭게 책을 내면 될 것 같습니다. 비싸지 않고,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고, 그저 교실에서 써본 것이라면 함께 나눌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돈을 벌겠다고 하면 힘든 일이겠지만 나누겠다고 하면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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