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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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한가위가 일주일도 안 남았습니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다음부터 청주에 있는 형님네에 다니러 갑니다. 차례를 지내자 마자 쉴틈도 없이 돌아오는데, 그때 다들 움직이는지 차가 막힙니다. 해가 져서야 집에 오는데 뒷산 위로 둥그런 달이 떠있습니다. 한가위 때 보는 달은 남다릅니다. 크고 밝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을 만져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다들 한가위 달에게 소원을 비나 봅니다. 저도 그 달을 보며 소원을 빕니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습니다.희망을 품어서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올해도 달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어떤 소원을 말할지 궁금합니다. 소원을 빌고 나면 저처럼 뿌듯한 마음이 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소원은 하늘로 올라갈 것 같습니다. 가끔 조용한 밤하늘에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면 그때 이루지 못한 소원이겠거니 생각을 합니다.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한가위라고 따로 선물을 주고 받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차 막히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차 막혀도 즐겁게 다녀오시라고 인사드립니다.

 

일요일날은 주인아주머니 텃밭에서 고추를 땄습니다. 누가 따라고 한 건 아닌데 매일 반찬을 얻어먹다보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올해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여름에 고추를 따면 금세 땀에 젖습니다. 바구니 한 가득 고추를 따서 그늘에 말렸다가 햇볕에 말렸다가 합니다. 그러면 빨갛게 잘 마릅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고추 따기가 쉽습니다. 날이 덥지 않아서 좋고 고추가 얼마 안 남아서 조금만 따도 됩니다. 어제 따서 말렸으니, 한가위 전에 한 번 더 따면 올해 고추 따는 일은 끝이 납니다.

가을 농촌에는 주로 거두는 일을 많이 합니다. 참깨도 거두어서 말리고, 조금만 있으면 고구마도 캐고 들깨도 베어서 말릴 것입니다. 늦여름에 심었던 배추와 무우도 거두어서 김장을 담겠지요.

어제 고추를 따는 동안 아저씨는 털어놓은 참깨를 까불었습니다. 기계를 빌려와서 했는데 참깨가 너무 가벼워서 잘 까불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번에 참께 벨 때도 같이 거들어서 베었는데, 그렇게 베어서 말리고, 말려서 털고, 털고 나면 까불어서 모읍니다. 티끌을 다 주어내면 이제 참기름을 짜서 자식들 다니러올 때 한 병씩 내어줄 수 있습니다.

장에 내다 팔 수도 있지만, 그걸 어디 아까워서 팔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름 내내 밭에서 풀 매고 물 주고 했던 일까지 생각하면 그만 아득해집니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지만 보고 있으면 저같이 보는 사람도 한숨이 납니다. 아저씨께 왜 그렇게 힘들게 농사 짓냐고 물어보니까 땅이 있으니까 놀릴 수 없어서 짓는다고 합니다. 땅이 있는데 놀리면 죄가 된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땅이 있어서 농사를 지으면 누군가 입에 들어가는 목숨이니까요.

아저씨처럼 들판에서 농사 짓는 사람들을 보다가 내가 하는 일을 돌아봅니다. 나는 누군가 입에 들어가는 목숨같은 일을 하는지 말입니다. 많이 배웠다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지요. 날이 더우면 덥다고 에어콘을 켜고, 추우면 춥다고 히터를 켜놓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그걸 살펴볼 생각은 않고 짜증부터 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생 하면서 누군가 마음속에 못이나 박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습니다. 죄나 짓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그렇게 고추도 말리고 깨도 말립니다. 옥상에도 말리고, 골목길에도 말리고 마당 한 가운데 해 잘 드는 곳에다 말립니다. 모두 동네 할머니들 일입니다. 여기 물골안에 처음 와서 가르친 아이 하나가 고추 말리는 일을 시로 썼습니다. 할머니 이야기를 쓴 것이지요.

 

할머니

권**(3학년)

우리 할머니는 정말 애쓴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할아버지 진지 드시게 하고

나 깨우고 밥 주시고

내가 나가자마자 고추 따러 가신다.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하시고 집에 와서

저녁밥 만들어 놓고

내가 잘 때 같이 주무신다.

그때마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요즘도 고추 말리는 것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납니다. 내가 물골안에 들어온지 6년이 지났으니 그때 3학년이었던 아이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키가 크고 잘 생겼는데 가끔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부지런히 하면 된다고 말해줍니다. 가겟방 앞에 나와계신 할머니도 가끔 뵙습니다. 그때 다리가 아프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장가가고 아이 낳을 때까지 오래 오래 사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번에 우리반 아이들이랑 허수아비를 만든다고 했는데 여섯 개를 만들어서 네 개는 연경이, 정근이, 은솔이 할아버지 논에 갖다 드렸고, 두 개는 학교 마당에 세웠습니다. 정근이, 연경이 할아버지 논은 학교 오는 자전거길 옆에 있어서 매일 봅니다. 오랫동안 물골안에 허수아비를 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참새가 무서워 하지 않으니 안 세우는 것이지요. 옛날 사람들은 왜 허수아비를 세웠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번에 허수아비를 만들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을을 같이 느끼려고 그런 게 아닐까? 같이 보려는 마음, 함께 하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을 했습니다.

올 한가위는 여럿이 함께 지내면 좋겠습니다. 목숨같은 햇곡식도 나눠먹고, 햇과일도 쪼개서 함께 맛보시기 바랍니다.

 

2015년 9월 21일

물골안에서 김강수 아룀.

 

 

덧붙이는 말>

 

1. 이제 누리집에 몇몇 분들이 글을 쓰십니다. 주말에는 박진환 선생님께서 남한산학교 간 이야기를 써놓아서 반가웠습니다. 이창수 선생님은 매일매일 낱말 풀이를 올려주시고, 연영 간사님은 예전 누리집에서 자료를 퍼 오십니다.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데 매일매일 하다보니 제법 많이 쌓였습니다. 선생님들께서도 가끔 들어오셔서 글 남겨주세요. 모임 누리집 주소는 http://www.urimal.or.kr 입니다.

 

2. 지난 번 편지를 보내고 나서 함께 만드는 부록 소개글을 써주신 분이 몇 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몇 분 더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길게 쓰신 분도 있던데 그러지 말고 동화나, 시 한 편에 한두 줄의 소개글을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 지난 번 부록 자료 "먹으면 먹을수록 소심해 지는 밥은?"에 실린 그림중에 몇 개는 저와 우리반 아이들이 그렸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만든 자료라 함께 하다보면 재미가 있을 겁니다. 혹시 아이들과 수업에 쓰시려면 연영 간사님께 전화를 주시면 권당 500원으로 보내드립니다. 돈을 남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낱말 공부를 함께 하려는 뜻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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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니(수원진현) 2015.09.22 15:07
    대학생때 농활을 가서 고추를 따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뻗었다는....좋아하는 먹거리가 많이 나오는 가을이라 돈 주고 사먹으면서 이래서 가을이 좋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참 가볍기만 한 말이어서 뜨끔합니다. 그래도 우리 농산물을 많이 사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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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감 2015.09.25 08:37
    진현 선생님, 이번 가을호도 잘 받아보았습니다. 선생님들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올 한 가위도 먼 길 떠나야 하지요?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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