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에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 사이 한가위가 지나가고 가을이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 학교는 한가위 쉬는 날이 끝나고 나서도 며칠을 더 쉬었습니다. 봄이나 가을에도 일주일씩 짧은 방학을 두자고 한 것인데 올해부터 그렇게 하는 학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가을 방학 덕분에 미뤄두었던 책도 읽고 여기 저기 밀린 글도 쓰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와 함께 여는 국어교육> 가을호도 그때 읽었습니다. 강화도 학교에 계신다는 박종란 선생님 글을 읽었습니다. 아침마다 아이들 손을 잡고 걷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싶었습니다. 엄마 아빠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밥 먹은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나 기분 좋은 이야기 같은 것을 나누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선생님도 속에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삶을 나누면서 걸어갈 때는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누가 배우는 사람인지 나누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와 우리반 아이들도 저 선생님처럼 다정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다른 선생님 이야기도 읽었습니다. 진주형 선생님의 글도 읽고는 '월간 구봉'을 나도 한 번 보고 싶었고, 박정의 선생님 이야기도 읽고는 깜짝 놀랐을 시립 미술관 사람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습니다. 만만하게 봤다가 아이들한테 한 방 제대로 먹은 셈이니까요. 물골안 산골에 살고 있으면 가끔 쓸쓸해질 때가 있습니다. 혼자 생각이 빠질 때도 있고,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이번 가을방학에는 <어린이와 함께 여는 국어교육>이 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온나라 곳곳에서 퍼올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읽다보니까 외로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길을 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요. 나도 힘을 내어서 한 걸음 앞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계간지를 읽다보니 우리 학교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 살펴봤습니다. 게시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교실은 2층에 있습니다. 아침마다 2층으로 올라오다보면 계단에 게시판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거기에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써 있고 축구선수 박지성, 가수 빅뱅, 임연아, 우주인 이소연의 사진이 함께 붙어있습니다. 별 생각없이 지나쳤는데 한 날은 문득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 중에서 저렇게 돈 잘 벌고 유명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올까 싶었습니다. 저렇게 붙여놓으면 기가 죽어서 어디 꿈이라도 한 번 꾸겠냐 싶었지요. 꼭 저렇게 유명해져야 꿈을 이룬 것인지, 소박한 꿈은 꿈도 아닌 건지 묻고 싶었습니다. 우리 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모두 그렇습니다. 어쩌면 사람 사는 온누리가 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텃밭에서 난 나물로 밥을 해먹고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소박한 삶 보다는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남을 부리며 사는 삶이 더 떵떵거리고 있으니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온누리가 다 그렇게 돌아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만이라도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내일은 교사 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게시판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큰 학교라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6학급짜리 우리학교에서는 다들 귀를 기울여들어줄 것 같습니다. 다음 편지에 어떻게 되었는지 짤막하게 쓰겠습니다. 이번에는 우리학교 아이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4학년에 쌍둥이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이름도 잘 모릅니다. 쌍둥이라서 3월부터 눈에 띄었는데 하루는 둘이 함께 복도를 지나가길래 물어봤습니다. "누가 진짜니?"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한 아이가 이야기를 받아주었습니다. "제가 진짜고요, 얘는 가짜예요." 그랬더니 다른 아이가 "아니에요. 쟤가 가짜예요. 내가 진짜라고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다른 4학년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옆에 몰려들더니, 한 아이가 눈치 빠르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 얘가 진짜고요. 쟤가 가짜예요. 재는 점이 없어요." 그러더군요. 고 녀석들, 옛이야기깨나 읽었구나 싶어서, "그래, 너희 집에 큰 항아리 아직도 있어? 엄마는 아직도 누가 진짜인지 모르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른 아이들도 씩 웃습니다. 다음에 한 번 놀러가겠다 하고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지요. 우리반 1학년 아이들 항아리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그 아이들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잘못해서 항아리에 빠졌는데 꺼내보니 또 들어있어서 또 꺼냈는데 누가 진짜인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겨우 100명 정도입니다. 교실이 떨어져있지만 밥도 한 곳에서 먹다보니, 하루에 한 번은 마주치게 되지요. 1학년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4학년 누나에게 물어봅니다. "누나가 진짜야?" "누나 점 보여줘." 처음에는 말대답을 해주던 아이가 이제는 귀찮아서 그냥 지나갈 때도 많습니다. 그 쌍둥이 아이가 자라서 학교를 떠올리면서 무엇을 기억할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누가 진짜냐고 묻던 이상한 선생님과 덩달아 귀찮게 물어보던 1학년 아이들도 한 번쯤은 기억해줄 것 같습니다. 계간지 부록 중에 <먹으면 먹을 수록 소심해지는 밥은?>에 이야기 한 편이 실려있습니다. 어제 그 이야기를 우리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중간쯤 읽었는데 맨 앞에 앉은 기범이가 어찌나 웃던지 몇 번이나 끊어졌습니다. 마지막 대사인 '백 년 후에 돌아오마'를 읽어주는데 우리반 아이들 모두 뒤집어졌습니다. 한 번 더 읽어달라고 해서 세 권을 교실 앞에 두었더니 쉬는 시간에 가져가서 읽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더니 밥 먹으러 가서 저에게 수수께끼를 내었습니다. 거기 수수께끼가 들어있거든요. 1학년에게는 좀 어렵다 싶어서 덮어 두었는데 선생 없이도 지들끼리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어쩌면 선생님이 없어야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만 줄입니다.
2015년 10월 8일 물골안에서 김강수 아룀.
덧붙이는 말
1. 내일은 한글날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글이 어떤 글자인지 알아보거나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누리집 자료실에 박지희 선생님이 올리신 자료가 있습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쓰실 수 있습니다. 내려받아서 한 번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2. 예전에 전남 모임에서 만든 자료도 있어서 내려받고 썼는데 학교를 옮기면서 제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전남모임 선생님들 중 누군가가 다시 올려주시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3. 새로 가입한 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회원에 새로 가입을 하시면 제 편지를 받게 됩니다. 저는 올해 모임의 회장을 맡은 김강수입니다. 선생님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모임 이야기도 전해드리려고 가끔 편지를 씁니다. 귀찮은 편지가 될까봐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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