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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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샛노랗습니다.

보고 있으니까 빛깔이사람을 홀리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영양사 선생님이 급식 교육을 하겠다고 해서 저는 교무실로 기타를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교감 선생님과 교무보조 선생님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래를 두세 곡 불렀습니다. 김광석이 부른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옛모습'과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불렀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부탁하셔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불렀습니다. 저는 기타를 잘 치거나 노래를 썩 잘 하지 못합니다. 기교없이 기타를 치면서 나즈막히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좋습니다. 기분이 내킬 때 교실에서도 혼자 부르곤 합니다. 

그날 교무실에서 두 명의 청중을 두고 불렀는데 마음이 울컥, 내려앉았습니다. 운동장 너머 샛노란 은행나무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김광석처럼 온통 흐린 가을 하늘이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하늘이 축축합니다.

중간 놀이 시간에 놀다 온 아이들이 비가 온다고 하더군요. 효재가 한두 방울 맞았다고 하니까 그 옆에 있던 영인이가 열 방울도 더 맞았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비가 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양은냄비를 꺼내고 물을 부어서 버너 위에 올렸습니다. 마침 수놀이 시간이라 전날 배운 것을 혼자서 풀어보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사각거리면서 연필을 놀리는 사이 저는 창문도 닫고 앞문 뒷문도 모두 닫습니다. 냄새가 나갈까봐 그렇습니다. 라면을 부셔서 넣고 스프도 넣고 나무젓가락을 휘휘 젓습니다. 조금 있으면 라면 냄새가 온 교실에 퍼지고 창문도 뿌옇게 김이 서립니다. 먹지 않아도 몸이 먼저 따뜻해집니다.

다 익기 전에 불을 끄고, 종이컵 열여덟 개에 라면을 옮겨담아서 아이들에게 건네줍니다. 뜨거울 텐데 아이들은 손가락 끝으로 집어서 잘 가지고 갑니다. 후루룩 거리면서 맛나게 먹습니다. 나도 컵 하나 라면을 부어서 아이들과 같이 먹습니다. 국물 한 모금 마시면 뱃속이 뜨끈해집니다. 아이들도 똑같을 것 같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라면을 끓여줍니다. 올해도 그렇게 하겠다고 3월에 학부모에게 편지를 썼는데 언젠가 민준이가 와서 "선생님, 우리 아빠가 물어보던데요. 장마때는 매일 끓여주실 거예요?" 했습니다. 다행히 올해는 장마가 없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비가 자주 왔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는 맑아서 그냥 나갔는데 점심 때부터 비가 올 때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책가방을 머리에 얹고 뛰어오기도 했지만 많이 내리는 날은 온통 젖어서 돌아왔습니다.

어떤 엄마는 공부시간에 우산을 주고 갈 때도 있고,  끝날 무렵 교문 앞에 기다리기도 했지만 저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할머니께서 네 남매를 뒷바라지하며 키우셨습니다. 할머니는 한 번도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손자 우산을 가져다주러 학교까지 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비 오는 날 흠뻑 젖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날은 추워서 덜덜 떨립니다. 아마 오늘 같은 가을이었을 겁니다. 수건으로 닦고 옷을 갈아입으니까 할머니께서 라면을 끓여놓으셨습니다. 후후 불면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따뜻한 그때 라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라면을 끓여 먹곤 합니다. 그러면 할머니 생각이 먼저 납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따뜻해지곤 합니다.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기로 한 건 할머니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듯 이 아이들도 나를 기억해줄까 생각합니다. 나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내가 끓여준 라면은 기억하겠지 싶습니다. 따뜻한 라면 냄새도 기억하고, 동무들과 함께 나눠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도 기억날 것 같습니다. 온통 뿌옇게 감싸주던 김서린 유리창도 기억하겠지요. 내가 그랬듯이 아이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2015년 10월 26일

물골안에서 김강수 아룀.

 

<덧붙이는 말>

 

1. 다자이 오사무의 '나의 소소한 일상'을 읽고 있습니다. 거기 "우리를 자살하게 만드는 정부나 국가는 빨리 사라지는 편이 났습니다. 아무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써있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그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불렀던 김광석도 자살을 했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등질 수 있지요. 아픈 일입니다.

 

2. 가을 빛깔이 사람을 홀린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난 뒤 운동장 건너 은행나무 밑 오솔길을 걸어보았습니다. 혼자서 걷는데 내일은 아이들과 함께 와서 걸어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걷다보면 홀린듯 가을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지난 주에는 지역모임 회장님들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동화 소개를 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해보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내년에는 우리 모임 선생님들의 책 목록이 하나 나올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희망이 생겨 났습니다.  

 

4. 지난 주에 광주의 김형도 선생님이 겨울 연수 계획을 짜서 올려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집행부들이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 겨울 연수가 재미날 것 같습니다. 빨리 마무리해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리겠습니다. 겨울에도 한 자리에 모이면 좋겠습니다.




역사에 후퇴란 없습니다.
끝없이 전진하는 용기있는 자만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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