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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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컴퓨터 앞에 앉아 아이들 성적표 글을 쓰다보면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릅니다.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는데도 그렇습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방학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기다리던 방학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들은 방학을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맨날 '공부해라!' 말씀하셔서 선생님들은 모두 공부만 좋아하고 노는 방학은 안 좋아하는 줄 알았지요. 선생님 월급 날에 맞춰 방학중 등교일 같은 것이 있었는데 학교 갈 때마다 선생님이 계셔서 선생님은 방학 때도 맨날 학교 나오는 줄 알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제가 선생님이 되어 첫 방학을 맞았습니다. 좋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방학식 끝나고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면서 속으로 만세를 몇 천 번도 더 불렀을 겁니다.

친구들과 바닷가도 놀러갈 생각도 하고 고향 부모님과 형제들도 만나러 갈 생각, 대학교 선배들과 후배들도 만나고 동네 친구들도 만나서 술 마시고 놀 생각에 방학식 내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첫 방학을 보내고 나서 다음 방학 부터는 가끔 연수라는 것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같은 동네에 김영주 선생님이 있어서 어린이문학회 연수도 따라가고 교과연합 연수도 찾아가고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끼리 모이는 연수에도 함께 가곤 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전교조 연수도 있어서 멀리 차를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가면 맨날 정세가 어떻고, 투쟁방향이 어떻고, 어려운 말을 해서 중간에 당구를 치러 도망나왔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때 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방학은 기다려집니다.

3월에 아이들을 만나서 익숙해질만 하니까 방학을 합니다. 익숙해졌다는 말은 다른 말로 둔감해졌다는 말도 될 수 있지요. 아이들이 하는 말, 아이들과 관계,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때가 자주 생깁니다. 누군가는 날씨도 더워지고 지쳐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럴 때 방학을 합니다. 더위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과 떨어져 있으려고 방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학 때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오히려 아이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고보면 방학은 아이들 사랑을 확인하라고 만든 게 아닐까 실없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방학을 끝날 때 쯤이면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는 걸 보면 영 뜬금없는 소리만은 아니겠다 싶습니다.

이오덕김수업교육연구소를 만들고 나서는 방학 때마다 나들이를 떠납니다. 2년 전 겨울에는 진주에 계시는 김수업 선생님과 대구에 계시는 서정오 선생님을 만나뵈었고, 그 다음 방학에는 방배동의 박문희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빌뱅이 언덕에 들렀다가 안동대학교 임재해 선생님 만나고 왔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내 몸에 이야기가 쌓이는 것 같습니다.

 

"김선생님, 혁명의 유혹에 빠지지 마세요."

 

아기장수 이야기가 백성들의 계급의식을 드러낸다고 했더니 듣고있던 김수업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입니다. 그 뒤로 급하게 서두르거나 욕심을 내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두가 함께 나눠 먹었던 비빔밥도 좋았고,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어간 진주성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도 기억이 납니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강 위 물비늘처럼 반짝이던 느낌은 오래 남았습니다.

아람 유치원에 가서 하루종일 박문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다스럽게 혼자 이야기를 하시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유치원 아이들 재잘거리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끝나고나서 선생님 제자 가게에 문을 따고 들어가 마신 맥주가 참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안동 가는 길에 권정생 선생님 살던 집을 들렀습니다. 툇마루도 없는 두 칸짜리 작은 집이었습니다. 앞에는 개울도 흐르고, 뒤에는 바위로 된 빌뱅이 언덕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한 세상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뭔가 싶었습니다. 오후에는 임재해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겨레말을 살리는 모임>이 있는 대전으로 건너갔습니다. 여관을 잡고 나서 당구장에 들러 당구도 치고, 맥주깡통을 사와서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맥주를 다 먹고 나서는 이불을 깔고 누워서 영화를 틀어서 봤습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한국영화였는데 영화 보면서 다들 어찌나 추임새를 넣는지 킬킬거리며 웃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다음날 겨레말 살리는 모임에 일찍 가서 이야기를 들었스비다. 겨레말 살리는 모임은 어른들이 많아서 그 분들 이야기를 듣고 있기만 해도 좋습니다. 일이 더디게 가서 답답해도, 그렇게 가야 튼튼하게 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난 겨울까지 제가 다녀온 여행입니다.

여행을 가보면 만나는 모든 것이 새록새록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는 배울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가서 보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길동무입니다. 누구와 같이 가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는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김광석의 노래 중에 "첫 딸아이 결혼식에 흘리는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첫딸 아이 결혼식을 끝까지 함께 한 부부가 길동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첫딸 아이 결혼식을 기어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내와 함께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방학 때 먼길을 떠날 때마다 저에게도 쉽게 변하지 않는 길동무가 있습니다. 가는 내내 쉬지 않고 떠드는 동무도 있고, 묵묵히 차를 운전하는 동무도 있습니다. 직접 나무로 짜서 선물은 만들어가는 동무도 있고 바쁜데도 시간을 시간을 맞춰주는 동무도 있습니다. 그런 동무들과 함께 가다보니 길이 멀지 않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먼길을 떠납니다. 무너미에 갑니다. 거기서는 또 어떤 것을 보고, 듣고, 겪을지. 그리고 동무들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게 될지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또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어제 뒷풀이를 할 때 이 편지를 받아보는 동무 한 명이 너무 길다고, 길어서 힘들다고 했는데...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습니다.

1학기 마지막 편지라서 그런가 봅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온나라 선생님들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멀리 떠나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무들과 어울려 먼길을 떠나보라고 꼬시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리저리 길게 쓰다보니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편지를 읽는 누군가 한두 분 정도는 '음... 하루라도 동무들과 먼길을 떠나봐야겠군.' 생각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지난 학기, 아이들 가르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방학에는 책도 많이 읽고 더 자주 밭에 나가보려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겨울 임재해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마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때 마음에 새기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을을 살릴 수 있는지, 학교와 교사가 중심이 되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대답하신 말입니다.

 

"학교가, 교사가 구심점이 되려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 살고 있는 분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마을 일에 관심을 보이고, 마을 행사의 참가자가 되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나누면서, 소외되는 사람없이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듣고 나서 그런 마을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5년 7월 23일

물골안에서 김강수 아룀.

  • ?
    땅감 2015.07.30 12:01
    회원 선생님들께 편지 쓴 것을 여기 올려두는게 좋겠다는 분들이 계셔서 이곳에 올려둡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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