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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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새까맣게 구멍이 뚫린 것 같습니다. 천둥 벼락도 칩니다. 무섭습니다.

학교 앞 개울도 싯누런 흙탕물이 넘실거립니다. 건너편 둑을 넘을 것처럼 무섭게 불어났습니다. 쌓였던 쓰레기들도 모두 훑어서 내려갈 것입니다. 물은 흘러서 대성리로 갔다가 다시 북한강, 한강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겠지요.

 

오늘도 우리반 아이들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중간 놀이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실에 앉아서 예인이가 가져다준 호두를 씹고 있는데 은서가 똥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은서 말에 다른 아이들도 똥냄새인지 모르겠지만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가만히 맡아보니 그렇습니다.

온풍기 밑을 쓸어보았습니다. 온풍기 아래에서 우유가 썩어갈 때 나는 냄새와 비슷했거든요. 온풍기 아래에서 쓰레기가 나오긴 했지만 냄새 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근처 아이들의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습니다. 서랍 속에서도 우유가 썩어갈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책상 서랍도 말짱합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의 책가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리를 잘 하지 않아서 책상 주위에 늘 쓰레기가 떨어져있는 아이입니다. 착하고 순하지만 설렁설렁 공부를 해서 야단을 맞곤 했습니다. 그냥 승아라고 부르겠습니다.

승아의 가방은 며칠 전부터 부풀어 있었습니다. 공부시간에 얼핏 보긴 했지만 준비물이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냥 지나친 것이지요. 그러다가 오늘 승아 가방을 열어보았습니다.

가방을 열자마자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가방에는 터진 우유곽이 있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닙니다. 하나하나 꺼내보는데 스무 개가 넘습니다. 우유곽에서 흘러내린 썩은 물이 오래된 안내장과 섞여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책가방 바닥에도 찐득하게 붙어있습니다. 곰팡이도 피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놀라서 지켜봅니다. 코를 싸매고 뭐라뭐라 합니다. 승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줄 모릅니다. 마침 과학시간이라 아이들을 과학실로 쫓아 보내고 승아와 둘이서 책가방 정리를 합니다.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보니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연필도 지우개도 지갑도, 승혜가 자주 가지고 놀던 인형도 꺼내서 모두 버렸습니다. 텅텅 비우고 수돗가에 가서 가방을 헹굽니다. 대충 냄새를 빼고 물이 빠지게 널어둡니다.

“승아야, 집에 가면 가방 빨아야 돼. 아빠가 빨아주시니?”

승아는 언니가 빨아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웁니다. 왜 우냐고? 이제부터 정리 잘하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냄새 나서 놀릴 거라고 걱정합니다. 놀리면 선생님이 혼내줄 거라고 잘 달래서 과학실로 보냈습니다.

냄새 밴 손을 씻고 교실에 앉았는데 참 기가 막힙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고도 내가 선생인가 싶습니다.

승아는 아빠와 함께 살아갑니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지만 고등학생이라 자기 일로 바쁩니다. 엄마는 따로 나가서 살고, 아빠는 하루 종일 가게 일로 정신이 없습니다. 3월에 가정방문을 갔을 때도 씽크대에 치우지 못한 음식이 남아있었지요. 승아는 선생님이 놀러온다고 이리저리 치웠지만 방도 어지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수첩에 써놓았던 것 같습니다. 바빠서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선생인 나라도 챙겨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만 했던 것이지요.

3월이 지나고 승아에게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종이를 아무 곳에나 흘린다고, 우유를 먹고 껍질을 바닥에 버린다고, 책상 서랍이 엉망이라고 잔소리를 했지요. 한 번도 나서서 도와주거나 정리하는 방법을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시켰습니다.

승아는 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가방에 우유를 넣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방은 닫아놓으면 모르니까 말입니다. 먹고 난 우유곽도 먹지 않은 우유곽도 그렇게 승아 가방에 쌓여 썩어가고 있었겠지요.

다른 곳에 선생님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공부가 어떻고, 아이들 삶이 어쩌고, 문학이 어쩌고저쩌고 떠듭니다. 가르치는 것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먼저라고 소리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 돌봐줘야 합니다. 자기 앞가림을 잘 못하는 아이건, 어른이건 부족하고 모자란 곳이 보이면 서로 돌봐줘야 하지요. 그래야 함께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 만든다고 여기저기 자랑이나 하면서 저는 부풀어가는 승아 가방도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뻥 하고 터져야지 돌아봐 주었겠지요. 그러고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 먼저라고 입으로만 떠듭니다. 기가 막힙니다.

우리반에는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해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어디론가 떠났거나 바쁘거나 자주 만날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에게는 가르치는 것 말고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3월에는 가정방문을 하니까 아이 이야기도 들어보고 살갑게 대합니다. 그러다가 차차 익숙해지면 보살피지는 않고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선생이라고 믿었는데 이만저만 배신이 아닙니다. 승아도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방금 승아에게 했던 약속이라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놀릴까봐 걱정하는 승아에게 그러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 말입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참 제가 봐도 제가 걱정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2016년 7월 5일

물골안에서 김강수 아룀.

 

덧붙이는 말>

강산여름배움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신다고 신청을 했습니다. 어떤 분과에는 많이 신청하고 어떤 분과는 적어서 걱정입니다.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마다 제 빛깔을 가지고 살아온 것들을 펼치는 자리를 펼치겠다 했지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보다 못해서 오늘 아침 김영주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부지런히 하지 못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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